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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성수교
항일의사

해주최씨 인물로는... 

고려朝  9名臣 [ 2세祖 충(冲), 3세祖 유선(惟善), 4세祖 사제(思齊), 사량(思諒), 사추(思諏), 5세祖 약, 6세祖 윤의(允儀), 8세祖 자(滋), 9세祖 유엄]을 비롯하여, 

여지승람(輿地勝覽) 해주최씨 인물(海州崔氏人物)에 수록된 13인 [충, 유선, 사제, 사량, 사추, 약, 윤의, 홍윤, 자, 유엄, 춘명, 함, 만리] 과  공신(功臣) 9인 [충, 유선, 사추, 유엄, 단, 황, 빈, 산휘, 응수]등 그 수를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며,

 

고려 공민왕 시절 홍건적 난(亂)때 순절한   친어대호군(親御大護軍) 인부(仁富 :12세祖),

 

조선朝 부자(父子) 2대에 걸쳐 아름다운 공적을 남긴 해성군(海城君) 황(滉)과 해천군(海川君) 유원(有源 : 좌랑공파),

 

조선朝 영조 묘정에 배향된 조선朝 유일의 해주최씨 영의정(領議政)  규서(奎瑞 : 전한공파),

 

그리고 조선개국에 맞추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영랑장(領郞將) 안택(安澤 :12세祖)과 

그 후손으로 임진왜란시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진양(晋陽)의 고립된 성(城)에서 용맹을 떨치다 분사(憤死 : 자결)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 경회(慶會)장군과 그 형제 조카(경운, 경장, 홍재, 홍우, 홍기 : 승지공파),

 

또 왜장과 함께 강물에 뛰어 들어 죽음으로서 부군(慶會)의 원혼을 달랜 재취부인 의암(義岩) 주논개(朱論介 : 참조)등, 

비록 경상에 오르진 못했지만 아름다운 치세로 하여 세상에 빛을 발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고려 朝 예종은  약(5세 한림학사)과 주(湊 : 평장사)에게 내린 교서(敎書)에,

『대대로 팔원(八元)과 같은 훌륭한 전통을 가졌고 집안에는 만석군(萬石君)의 기풍을 세웠다』라고 칭찬하였고,

 

[고려사열전]에는 최충()의 집안은 대대로 공신(功臣)이요, 이름 난 명신(名臣)이 많아 오랜 동안 부귀 영화를 누렸다. 

자손들 또한 대 문장가 후손답게 음서의 혜택을 외면하고, 오로지 자신의 학문으로 과거에 급제하였거나 가문의 성세가 한층 더 하였다 했으며, 

해동공자 문헌공 최충의 자손 중에 재상(宰相)된 사람만도 수 십 인이 넘어 집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정도였다 하였으니 당시 집안의 영화로움이 잘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개성부 고적(開城府 古跡)]에 보면 다음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 현종 이후에 병란이 겨우 그쳤지만 문교를 펼 겨를이 없었다. 

이 때에 최충(崔冲)이 후진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드디어 고려수도 개경 자하동에 [구재]를 열었으니 ....

낙성재(樂聖齋), 대중재(大中齋), 성명재(誠明齋), 경업재(敬業齋), 조도재(造道齋), 솔성재(率性齋), 진덕재(進德齋), 태화재(太和齋), 대빙재(待聘齋) 등이다. 

무릇 학문을 드높여 보려는 자는 반드시 이곳에 들어와 배웠으니 세상에서는 이를 최충도(崔徒), 사후엔 문헌공도라 불렀다. 

당시 12공도 중에서 가장 왕성하였으며, 최고의 학교로서 대우받았다. 


최충(崔冲)은 우리나라 사학(私學)의 원조(元祖)라 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존하여 불렀다.